"정확한 앎과 즐거운 삶 사이에서"

인류 역사에서 세계의 구성 원리와 존재 근거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계속되었다. 정답을 찾았다 착각하며 지내기도 했고, 도무지 해답이 보이지 않아 좌절에 빠지기 일쑤였고, 때로는 물음조차 잊고 생존에 열중하기도 했지만, 철학, 과학, 종교, 예술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인류의 의미와 각자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왔다고 대략 평할 수 있겠다.

 

그런데 말이다. 질문의 방향을 바꾸면 어떻게 될까. 그러니까 정답이 있을 테니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의무에서 벗어나서, 정답은 가능하지 않으니 가능한 다수의 답을 찾아보는 방향으로 생각과 실천의 틀을 바꾼다면, 정답에서 영영 멀어져 모든 게 혼란에 빠지고 말까, 아니면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이야기가 생겨날까. 이 책은 후자를 증명하며 정답이 존재하지 않을 때 훨씬 다양한 존재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정확한 앎에서 멀어지지 않으면서도 즐거운 삶에 다가설 수 있는 독자적인 철학의 가능성이 장쾌하게 펼쳐지니, 일단 즐겁고 다음은 놀랍고 드디어 정확한 앎에도 다가서는 기분이 든다. 물론 그런 게 있다면 말이다.

독일에서 가장 촉망받는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내놓은 독창적인 철학 대중서이다. 인식론, 존재론, 유물론의 주요한 철학 개념을 다양한 생각 실험과 비유, 위트를 버무려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명료하게 정리했다. 2013년 독일에서 출간 즉시 16주간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철학서로는 드물게 5만 부 넘게 팔리며 큰 화제를 모았다.

 

<철학은 엘리트나 즐기는 신비의 학문이 아니라, 폭넓게 열린 작업이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처럼 이 책은 철학사의 핵심적인 논의를 대중적인 언어로 풀어 놓는다. <부풀려진 철학 용어의 괴물> 대신, 무선 전화기, 소파, 거미, 일각수 등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떠올리는 다양한 대상들을 동원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높인다.

소개 : 스물여덟에 본Bonn 대학교 철학과 석좌 교수에 오른 독일에서 가장 촉망받는 철학자. 1980년 독일 라인란트팔츠 주의 소도시 진치히Sinzig에서 태어났다. 열다섯 살, 스케이트보드를 타다가 발목을 다쳐서 요양하는 동안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쇼펜하우어, 헤겔, 니체, 키르케고르를 읽으며 철학자로 살겠다는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 때 이미 본 대학의 철학 세미나에 참석했던 가브리엘은, 본 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거치며 철학, 고전문헌학, 현대 독일 문학을 공부했다.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는 독일에서 가장 촉망받는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내놓은 독창적인 철학 대중서이다. 인식론, 존재론, 유물론의 주요한 철학 개념을 다양한 생각 실험과 비유, 위트를 버무려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명료하게 정리했다. 2013년 독일에서 출간 즉시 16주간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철학서로는 드물게 5만 부 넘게 팔리며 큰 화제를 모았다.

<철학은 엘리트나 즐기는 신비의 학문이 아니라, 폭넓게 열린 작업이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처럼 이 책은 철학사의 핵심적인 논의를 대중적인 언어로 풀어 놓는다. <부풀려진 철학 용어의 괴물> 대신, 무선 전화기, 소파, 거미, 일각수 등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떠올리는 다양한 대상들을 동원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높인다.

그럼에도 이 책이 제안하는 문제의식은 결코 가볍지 않다. 1980년생의 젊은 철학자답게 저자의 포부는 당차다. 진리를 감각의 바깥에서 찾으려 했던 서양 철학의 오랜 형이상학 전통과 이에 도전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구성주의가 가진 결함을 극복하는 것이 책의 핵심 주제다. <세계><존재>를 열쇠말 삼아 과학과 종교와 예술은 물론이고, 미드와 같은 대중문화의 영역으로까지 철학적 고찰 대상을 넓히고 있다. 칸트, 니체, 하이데거, 하버마스 등 선배 철학자의 오류와 미흡한 주장에도 예리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막다른 길에 내몰린 철학>에게 새로운 활기를 부여하는 이 책에 대해 주요 언론은 <자신의 독자적인 철학을 세우려는 야심으로 빛나는 책>이라 평했고, 동료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는 그 자체로 <위대한 생각 실험>이라고 상찬했다.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이것은 우리들이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환영 속에서 살고 있다는 낡은 비유가 아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영역이자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원리로서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세계를 <시야(視野)>에 비유한다. 우리가 집에서 창밖을 통해 거리를 내다본다고 해보자. 마침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시야를 정확히 그려 낼 재주를 가졌다면, 이웃집 여자, 카페, 달 혹은 일몰을 그림으로 그려 낼 수 있다. 하지만 이 그림 어디에도 <시야>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그림이 보여주는 건 우리의 시야가 아니라, 우리 시야에 나타난 대상뿐이다. 세계를 두고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세계를 파악했다고 생각할 때마다, 우리가 가지는 것은 세계가 품고 있는 세계의 복사본일 뿐이다.

좀 더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자. 무언가가 세상에 존재하려면, 그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필요하다. 숫자 1은 자연수라는 그릇에, 인간은 영장류(또는 포유류나 생물)라는 그릇에, 행성은 우주라는 그릇에 나타난다. 저자는 이 그릇을 <의미>에 따라 구분된다고 해서 의미장이라고 부른다. 그럼 이 모든 그릇(또는 의미장)을 담아내는 세계는 어디에 담길까? 혹시 세계는 세계라는 그릇 속에 담기는 게 아닐까? 그럼 문제가 복잡해진다. 세계와 나란히 다른 그릇들이 놓이면, <세계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최초의 전제에서 어긋나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 속에 세계가 나타난다면, 세계를 담은 <최초의 세계>는 어떤 그릇에 담겨야 할까? 이건 분명 모순이다.

 

우리는 흔히 <존재한다>는 말로 현실 세계에 등장하는 사물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고양이, 휴지, 책은 존재하지만, 일각수나 마녀, 우리의 소망과 상상 등은 가짜라고 치부한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이 책에서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한다. <존재는 의미장의 속성이며, 의미장 안에서 나타나는 무엇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미장>이란 특정한 대상이 특정한 양식으로 나타나는 영역을 말한다. 왼손을 가지고 예를 들어 보자. 만약 나의 왼손이 몸이라는 의미장에 놓이면 신체를 이루는 일부로 나타난다. 또 화가의 작업실 모델이라는 의미장에 놓이면 예술 작품으로 나타나고, 점심을 먹을 때는 음식을 뜨는 도구로 나타난다. 더 나아가 물리학이라는 의미장에 놓이면 손을 구성하는 <작은 입자들의 뒤죽박죽>으로 나타난다.

가브리엘의 <의미장 존재론>에 따르면 상상이라는 의미장, 착각이라는 의미장, 신화라는 의미장 등등 무한히 많은 의미장들이 존재한다. 곧 우리 과학 지식에 비추어 우주 안에 존재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대상(일각수나 마녀)일지라도, 다양한 의미장 속에서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가브리엘의 독창적인 철학 <의미장 존재론>은 서양 철학의 위대한 선배들의 주장을 하나하나 점검해 가며, 그들의 어깨 위에 서서 다듬어낸 것이다. 가브리엘은 얼마나 많은 실체가 있는가 하는 물음을 두고 논쟁을 벌였던 스피노자, 데카르트, 라이프니츠의 일원론, 이원론, 다원론 가운데 다원론(무수히 많은 실체가 있다는 주장)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하고 있으며, <세계> 개념 역시 하버마스(<대상들의 총체>)와 비트겐슈타인(<사실들의 총체>)을 거치며 자신만의 개념을 정립할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오늘날 위세를 떨치고 있는 과학적 세계관을 향해 일침을 가한다. 과학은 <멋들어지게 꾸며진 허블 망원경 사진과 최신의 입자 모델>을 동원하여 과학이 이 세계를 설명해 줄 궁극의 시야를 열어 줄 거라고 호언장담한다. 심지어 스티븐 호킹은 <철학은 죽었다>고까지 말하여 과학의 승리를 공언한다. 하지만 가브리엘이 보기에 <우주>는 세계를 바라보는 특별한 관점일 뿐 <세계>는 아니다. 가브리엘은 <세계> 개념과 <우주> 개념을 철저히 구분할 것을 주문한다. 지구가 자전하고, 물체가 낙하하고, 질량과 속력을 계산할 수 있는 물질적 대상으로 이루어진 곳이 우주라면, <국가, , 실현할 수 없는 가능성, 예술 작품, 그리고 세계가 무엇인지 고민해 보는 우리의 생각>처럼 비물질적인 대상까지 포괄하는 것이 세계다. 우주가 아무리 넓다 해도 존재론적으로 보면 세계의 <변방>에 불과하다. 다른 대상들의 틈바구니에서 한구석을 차지하는 <촌스러운> 존재다.

그럼에도 모든 사건이 우주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치 식물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세상에는 식물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 주장에 따른다면, <연방 공화국 독일도, 미래도, 숫자도, 내 꿈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를 눈으로 보거나 만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누구도 국가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비과학적이거나 거짓이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가브리엘이 과학적 세계관이 <현대적 허무주의>를 불러온다고 진단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과학적 세계관에 의미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우주의 시선에서 보면 인간은 거대한 통 속에 갇힌 <입자 덩어리>, <그저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고 소화시키는> 우주 돼지에 불과하다. 이런 착각은 <사물 그 자체를 우주의 사물과 혼동해 온> 과학의 덫이다.

 

가브리엘의 과학에 대한 비판은 종교의 의미를 묻는 데서 더욱 빛을 발한다. 가브리엘은 종교를 <물신 숭배 종교><참된 종교>로 구분하고, <물신 숭배 종교>를 공격하는 과학이야말로 또 다른 물신 숭배라고 비판한다. <물신 숭배 종교>를 대표하는 것이 인간과 우주가 신의 개입에서 비롯했다는 창조주의다. 가브리엘은 신을 우주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는 모든 종교적 가르침을 단호하게 <헛소리>라고 비판한다. 그런 종교는 <모든 것을 포괄하고 지배하고 질서 지우는 세계 원칙을 갈망>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한 것일 뿐, 기껏해야 물신 숭배(인간이 스스로 만든 물건에 초자연적 힘을 실어 주는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가브리엘이 종교를 향해 겨누던 칼날은 다시금 과학을 향한다. 실상 <물신 숭배 종교>를 비과학적이며 근거 없는 주장이라며 의기양양하는 과학이란 것이, 물신 숭배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베버는 <사회 질서의 근본 바탕이 과학으로 확보되었다>는 맹신을 <세계의 탈마법화>라고 불렀다. 하지만 가브리엘이 보기에 과학이 우리에게 딛고 설 바탕을 제공해 주겠다고 강변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오늘날 과학자들이 주장하듯 모든 것이 진동하는 끈이거나 뇌 안의 물질이 일으키는 작용의 결과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고전적인 구원론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구원론 역시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실과 다채로운 세상이 환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섬겨지는 게 신인지 빅뱅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보편적 근원으로 꾸며진 것을 숭배하라고 강요하는 태도다>.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과연 좋은 걸까? 나쁜 걸까? 가브리엘은 확신한다.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쁜 소식이다.> 우리가 특정한 세계관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든 세계관은 <그 자체로 이미 왜곡이며 하나의 단면만 가지고 서둘러 일반화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는 더 큰 자유를 얻는다.

세계관의 부정은 그 자체로 정치적 함의를 띤다. <모든 것을 포괄해 완결 짓는 단 하나의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 자체가 전체주의를 배격하는 선언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가브리엘은 오로지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관점들을 관리하는 것만이 정치의 역할이라고 강조한다. 사상의 자유는 관점의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가브리엘이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이유다.

 

가브리엘은 우리 인생의 의미를 <무한한 의미와 대결을 벌여가는 일>이라고 말한다. 의미는 인간의 운명이며, 인간은 <의미로부터 도망갈 수 없는> 존재다. <알아내고 바꿀 수 있는 무한히 많은 의미>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해 가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렇다고 그 무한함에 질려, 어떤 근본 원리를 쫓거나 숭배 대상을 만들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이 책은 독자들에게 무한함을 향해 일대 탐험에 나설 것을 요청한다. <그 어디에도 안주하지 말고 긴 여행을 시작해야> 할 때라고. 우리를 둘러싼 의미장 속에서 <뭐는 그대로 두고 무엇은 바꾸어야 하는지> 고민할 때라고. 그렇게 우리들의 인생의 의미는 스스로 찾는 거라고.


정보제공 : 알라딘도서 / 열린책들